서울성곽을 이어가는 길이 있다는 사실을 안 뒤 언젠가 꼭 한 번 해보리라 마음 먹었던 성곽탐방을
산행선배 몇 분들과 오늘 비로소 실행에 옮긴다.
삼천리 강산을 원색으로 물들이고 있는 진달래와 만개한 개나리가 우리의 장도를 가는 곳마다
축하해 주었고 계속하여 쌀쌀하던 날씨도 오늘따라 봄날씨답게 포근하여 오히려 오후에는
더위까지 느껴지는 화창한 날씨였다.
서울성곽은 약 60%에 가까운 상당히 많은 구간이 복원되어 있었는데 낙산공원에서 혜화문으로
이어지는 구간에서 선답자들의 후기에 따르면 우측의 暗門을 빠져나가 삼선교 주택가 성곽을 지나
한성대역 지하도를 건너서 혜화문으로 진행해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었으나 대학로로 내려선
우리는 혜화동 로타리를 통해 혜화문으로 진행하는 바람에 삼선교 부근의 성곽을 지나쳤으며,
인왕산 구간의 성벽은 보수중에 있어 그 구간을 답사하지 못하고 우회하여 내려섰고 사직동으로
들어서면서 개발로 인해 성곽의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도록 멸실되고 건물들이 지어져 있는
도심을 지났고 서쪽의 돈의문(서대문)과 소의문(서소문)은 서 있던 자리를 추측할 뿐 어떤
표식도 발견하지 못하여 안타까운 마음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숭례문 복원현장을 지날때는 검은 연기를 토해내며 불길속에서 무너져 내리던 남대문의 모습을
온 국민들이 가슴을 조이며 안타까와 하던 순간이 머릿속을 스쳐갔으며 하루빨리 최대한
원형에 가깝게 복원되어 우리곁에 다시 서게 되기를 기대한다.
남산을 내려서며 길을 잘못들어 국립극장 부근부터 자유썬터에서 장충체육관에 이르는 성곽길을
놓치게 되어 아쉬웠는데 언젠가 시간을 내서 그 구간을 다시 찾으려 한다.
동대문 운동장은 한국 근대 스포츠 요람의 역할을 다한 채 패션의 메카로 발돋움하기 위하여
재개발 공사가 한창 진행중에 있었는데 개인적으로 이 부근에 소재한 학교를 6년 동안이나 다녔던
내 학창시절의 추억이 스며 있는 이곳이 모교의 교정에 이어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있는 현장을
목격하노라니 그 시절의 추억을 잃어버릴 것 같은 아쉬움이 밀려들었다.
8시 24분 동대문에서 일행 상봉 완료.
한 명은 회사사정으로 불참하여 3명이 서울성곽 따라돌기를 시작한다.
두산타워가 자리하고 있는 곳은 내가 다닌 중,고등학교 교정이 있던 자리다.
동대문의 본래이름 흥인지문(興仁之門).
예를 숭상하고(崇禮門) 어진 마음이 불일 듯 일어나는(興仁之門) 우리나라가 되었으면 좋겠고
우리문화 말살정책으로 일제가 이름을 바꾸어 놓은 것을 1996년 역사 바로 세우기 사업으로
남대문을 숭례문으로, 동대문은 흥인문으로 환원하였다고 하는데 정부는 더욱 홍보하고
국민들은 역사의식을 가지고 본래의 이름으로 불러 주었으면 좋겠다.
동대문역에서 이대병원 쪽으로 나와 성이 보이는 약국 골목으로 들어서면 성곽은 낙산(125m)으로
산책길을 따라 이어진다.
성곽을 따라가는 산책길에 개나리, 벗꽃, 목련 등 꽃들이 만발하여 우리를 맞는다.
잘 가꾸어진 대나무와 어우러진 소나무길이 더욱 운치가 있다.
쉼터 정자에서 배낭을 정리한다.
정자 뒤로는 두산타워가 높이 솟아 있다.
성벽을 따라 산책하 듯 걷는다.
첫 번째 암문에 이른다.
암문은 필요에 따라 적들의 눈에 잘 띄이지 않는 성벽에 전술용으로 설치한다.
두 번째 암문도 지난다.
성곽길은 이어지고 있다.
보수한 흔적이 선명한 성곽.
낙산에서 동대문, 종로6가, 대학로를 돌아 동대문, 창신역을 운행하는 마을버스 종점이 공원에 있다.
낙산공원에는 낙타의 등을 닮아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낙산(駱山) 안내문이 있다.
우리는 오늘 동대문에서 시계 반대방향으로 성곽을 따라 길을 잇는다.
잘 정비된 낙산공원.
낙산공원이 거의 끝나가는 우측에 암문이 있다.
이곳을 빠져나가 성곽을 따라가게 되어 있다고 선답자들의 산행기에 쓰여 있었으나 우리는
직진하여 좌측으로 동숭동으로 내려서서 대학로로 진행하게 되었다.
내려서며 본 성균관대 방향.
좌측으로 창경궁과 창덕궁으로 짐작되는 녹지대가 보이고 그 뒤로 희미하게 북악산이 조망된다.
동숭동으로 내려서는 계단.
대학로로 내려섰다(09:06).
대학로의 조형물들.
희화적(戱畵的)인 조각상의 표정이 재미있다.
동성고등학교 교정 옆에 있는 대한조국주권수호일념비.
일제시대 우리나라 학생들을 동원시켜 2차대전의 전장으로 내몰 때 이에 목숨걸고 항거 투쟁하다
다치고 죽고, 행방불명된 자들의 이름을 이곳에 새겨 치욕을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혜화문(惠化門)에 도착한다(09:18).
혜화문은 四小門 中 동쪽에 위치해 있는 東小門으로 태조 5년(1396) 9월 都城 축성과 함께 지었는데
당시는 弘化門이라 하였으나 창경궁의 東門을 홍화문이라고 이름지은 후 혜화문으로 개칭되었다.
北大門인 숙정문이 항상 닫혀 있어서 東小門인 혜화문으로 사람들이 번잡하게 드나들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도시계획의 명목아래 헐린 것을 1975년부터 시작된 서울성곽 복원사업으로
1992년부터 3년에 걸쳐 이곳에 복원되었다.
혜화문을 좌측으로 돌아 성곽은 이어지나 주택가로 가며 그 흔적이 부분적으로만 남아 있다.
한 주택의 담장을 이루고 있는 성곽.
경신고등학교 교정을 좌측으로 돌아 학교담장에 남아 있는 성곽흔적을 보며 진행한다.
校舍의 건축양식이 학교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었다.
학교담장의 기초가 되고 있는 성곽.
서울과학고를 지나면 성곽은 다시 제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와룡공원으로 오르는 능선을 따라 성곽은 이어지고 있다.
와룡공원에 도착한다(10:03).
우리는 이곳에서 간단하게 요기를 하며 휴식한 후 우측 통로를 통하여 말바위능선을 향한다.
북악산 서울성곽 탐방로 안내도.
성곽은 계속 이어지고...............
말바위쉼터 전망대에 서니 말바위능선이 눈앞으로 펼쳐지고 성곽출입안내소가 보이며 숙정문을
넘어서 이어지던 성곽이 곡장에서 왼쪽으로 돌아 북악산 정상을 향하고 오른쪽으로는 팔각정을
지나 군부대가 조망된다.
왼쪽으로 눈을 더 돌리면 북악산 정상 너머로 인왕산이 희미하게 조망된다.
말바위 앞에 선다(10:25).
조선시대 문무백관이 말을 타고 이곳에 올라와 시를 읊고 풍광을 즐기던 곳이라 하여 말(馬)바위라고
하며 북악의 산줄기가 동쪽으로 좌청룡을 이루고 뻗어 내려오다가 맨 끝에 위치해 있는 바위라
하여 말(末)바위라고 불리기도 한다고 한다고 설명되어 있다.
말바위 옆에는 서울시가 조망대를 설치하여 놓았으나 짙은 깨스로 서울시내 풍경은 가물거리고
시야에 들어오지 않아 아쉬운 발길을 돌린다.
말바위쉼터 전망대를 내려서며 본 삼청각.
과거에 권력자들이 많이 이용했던 요정으로 명성이 높았던 곳이다.
성곽출입안내소에 이른다(10:33).
이곳에서는 성곽출입을 위해 신고서를 작성하여 출입증을 교부받아 목에 걸고 들어가야 한다.
북악산 서울성곽은 하절기(4월~ 10월)는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동절기(11월~ 3월)에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출입이 허용되며 오전 10시와 오후 2시에는 해설사의 해설을 들으며
북악산 성곽을 탐방할 수 있다.
탐방안내소에서 숙정문으로 오르는 성곽길은 소나무와 어우러져 더욱 운치가 있다.
숙정문에 이른다(10:48).
숙정문(肅靖門)은 서울성곽의 北大門으로 南大門인 崇禮門(예를 숭상한다)과 대비하여
`엄숙하게 다스린다'는 뜻으로 이름이 지어졌다.
숙정문은 본래 사람들의 출입을 위해 지어진 것이 아니라 서울성곽의 동서남북에 사대문의
격식을 갖추고 비상시에 사용할 목적으로 문을 굳게 닫아두고 있었기 때문에 숙정문을 출입하는
큰길은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고 한다.
뒤돌아 본 노송과 어우러진 숙정문 전경.
성곽을 따라 노송길을 걷는 우리에게 산들바람이 동행하자고 쫓아온다.
백악마루 오름길 좌측으로 촛대바위가 위치한다.
촛대바위 정상에는 조선의 정기를 끊으려고 일제시대에 쇠말뚝을 박아 놓았다고 한다.
곡장을 향해 멋지게 굽이쳐 오르는 성곽길.
곡장(曲墻. 둥그런 곡선형태의 성곽)에 도착했다(11:12).
치(雉)란 성벽 중 일부분을 돌출시켜 성벽을 기어 오르는 적을 쏘거나 공격하기 위한 방어시설이며
여장(女墻)은 성곽위의 담장을 말하는데 1개의 여장을 1타라 부르고 1타에는 3개의 총구멍이 있다.
중앙에 있는 총구는 가까운 곳을 쏘는 근총안(近銃眼)이고 좌우 양쪽에는 먼거리를 사격하는
원총안(遠銃眼)이 설치되어 있는데 근총안 구멍은 비스듬하게 아래를 향하고 있으며 원총안은
수평으로 구멍이 나 있다.
가운데 근총안과 양쪽 두 개의 원총안이 한 개의 치를 이루고 있음을 이번에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곡장을 내려서며 본 청운대와 북악산, 그리고 오른쪽에 보이는 인왕산으로 성곽이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다.
성벽 축조방법은 시대에 따라 변했음을 알려준다.
알고나니 성곽길을 걷는 의미가 새로워진다.
성벽을 따라 이중으로 철조망이 설치되어 있다.
정권의 심장부 청와대를 지키기 위한 경계가 삼엄하고 수경사 군인들이 곳곳에 사복을 입고
통행자들을 주시하고 있다.
청운대에 닿았다(11:26).
사방으로 트인 전망을 둘러보며 잠깐 휴식한다.
북악산을 향해 따라가는 성벽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돌들이 있는데 여기에는 축조 당시
천자문에서 따온 공사구역 표시, 공사 담당 군현, 그리고 공사 일자와 공사 책임자의 직책과
이름 등이 기록되어 있다.
백악산(북악산. 342m)에 이르렀다(11:38).
정상으로 오르는 길에는 돌계단 위로 방부목으로 덮어씌워 놓았다.
소나무 그늘에서 배낭을 풀고 간식을 먹으며 잠깐 휴식했다.
북악산 정상의 조망은 사방으로 시원하다.
백악산 정상에서 바라 본 인왕산.
인왕산으로 이어지는 성곽이 뚜렸하게 보이고 우측으로는 기차바위가 보인다.
백악산을 내려서는 길은 경사가 가파르다.
창의문 성곽탐방 출입관리소 부근에 이르렀다.
목에 걸고 있는 출입증을 반납하고 창의문으로 내려선다.
내려서면서 본 창의문.
창의문으로 내려선다(12:16).
창의문(彰義門)은 북대문과 서대문 사이에 있는 北小門으로 `올바른 것을 드러내게 한다'는 뜻을
가진 문으로 북소문으로 불렸던 적은 없고 이곳 계곡의 이름을 따라 자하문(紫霞門)이라는
별칭으로 불려왔으며 서울의 사소문 중 유일하게 옛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창의문에서 도로를 건너 인왕산을 향하며 본 인왕산 등산 안내판.
성곽을 따라 5~6십 미터 쯤 진행하면 북악산에서 이어지는 인왕산길로 인해 성곽은 끊어진다.
인왕산길로 인해 끊겨진 성곽은 도로를 건너 다시 인왕산을 향해 이어진다.
쉼터를 내려서서 비포장 산책길을 1~2백 미터 인왕산길을 따라가다 포장도로로 올라선 후 2~3백
미터 쯤 진행하면 인왕산으로 오르는 출입문이 나온다.
출입문을 통하여 인왕산으로 오르는 계단길.
인왕산 출입구를 통해 계단을 올라선 후 수백 미터 진행하면 목책이 둘러진 이정목 앞에서
인왕산으로 이어지는 성곽을 만나는데 목책 우측 부분 구간은 통행금지로 성곽 2~3백 미터 가량을
이어가지 못하고 지나치게 된다.
성곽을 따라 인왕산 오름길을 간다(12:35).
성곽 안쪽으로 진행하다가 군부대가 있는 지점에서 철계단을 통해 성밖으로 나와 걷는다.
이 부근의 성벽에서 시대별 성벽 축조기법을 비교해 볼 수 있다.
인왕산을 오르며 뒤돌아 본 북악산(백악산).
북악산 우측 아래에는 청와대가 보이고 종로지역이 조망된다.
철계단을 통해 다시 성안으로 들어간다.
진행방향의 인왕산의 모습.
새로이 개축된 성곽을 따라 진행한 좌측으로 기차바위가 있는 암봉이 보이고 그 능선을 따라
좌측으로 내려서면 홍제동 방향이다.
인왕산(338m) 정상에 도착한다(12:58).
인왕산 정상을 뒤돌아서 본 무악재 건너편에 위치한 안산.
우리는 소나무 그늘 아래에서 점심을 먹으며 삼십 분 가량 머문 후 인왕산을 내려간다.
성곽 보수공사로 이어지는 성곽을 따라 가지 못하고 좌측의 인왕천약수터 방향으로 내려선다.
인왕천 약수터를 지난다(13:55).
석문을 지나 누상동 방향으로 내려서서 포장된 인왕산길을 따르다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진행하여
다시 만난 성곽을 끼고 걷는다.
돈의문 북측에서 창의문까지 청운지구 성곽 보수공사 개요 안내판을 본다(14:11).
사직터널 쪽으로 성곽은 이어진다.
뒤돌아 본 인왕산과 성곽.
보수공사로 인하여 인왕산 일부 구간의 성곽길을 이어가지 못함이 아쉽다.
내려서며 보는 서울시내와 남산.
우리는 가게에 들러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땀을 식히고 길을 계속간다.
낡은 기와위에 덮여진 천막이 오랫적의 달동네의 추억을 떠오르게 했다.
조금 내려서면 재개발로 최신식 아파트가 지어져 있었다.
좌측으로 대한축구협회를 지나고 성곡미술관을 지나며 홍난파 가옥을 찾으나 보이지 않는다.
우측으로 교원단체 연합회를 보며 진행한다.
메트로신문사를 지나 대로로 나오면 옛날 서울고등학교 터에 세워진 서울역사박물관이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광장을 지나면서 본 금천교(錦川橋).
조선 왕궁에는 북에서 발원하여 外堂을 돌아 흐르던 명당수가 있었는데 그 위에는 石橋가 설치됐다.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에 금천교가 설치되어 있었으나 경희궁이 헐리면서 금천교도 헐려 땅속에
묻혀있던 것을 2001년 발굴해 창경궁의 玉川橋와 창덕궁의 錦川橋를 참조하여 복원한 것이다.
전차를 보존처리하고 있는 현장을 본다.
전차는 1899년 5월 4일 오후 3시 동대문에서 이곳 경희궁 흥화문 간을 첫운행 했으며 5월 20일부터
정상운행을 시작한 이후 1968년11월 30일 운행을 멈출 때 까지 약 70년 동안 서울의 중요한
교통수단 이었는데,
당시에는 일정한 정거장이 없어 손을 들면 탈 수 있었고 요금은 상등칸 3전 5푼, 하등칸 1전 5푼으로
당시 쌀 1Kg의 가격이 4~5전 이었음을 감안하면 상당히 비싼 편이었는데 5세 이하 어린이는
무료였다고 한다.
나는 서울로 올라와 약 1년 간 전차를 이용해 을지로6가에서 하왕십리 간을 통학한 추억이 있는데
요금은 5원에 전차표 2장을 주었고 당시 버스요금은 5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보존처리 작업을 하고 있는 전차)
1899. 5. 4. 동대문에서 개통식을 하는 장면사진.
동대문 옆으로 길게 지붕이 씌워져 있는 곳이 전차 보관소였고 동대문 너머로 낙산으로 추정되는
산이 보이고 있는데 1960년 대 전차 차량기지는 신평화시장 부근에 있었다.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을 보며 지난다(14:48).
정동사거리에 이른다.
돈의문(敦義門. 서대문)은 강북삼성병원 부근에 있었을 것인데 1915년 전차 복선공사를 하면서
허물어 멸실된 채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길을 건너 정동극장 방향으로 진행한다.
정동길에 있는 회화나무는 수령 약 520년으로 수고 17m, 둘레 5.16m의 서울시 보호수다.
이화여고와 예원학교 담장 사이의 정동길을 지난다.
좌측으로 정동극장이,
우측으로 정동제일교가 보인다.
정동제일교회는 1887년 10월 9일 미국 감리교 선교사인 H.G. 아펜젤러가 이 자리에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감리교회로 1897년 말 완공된 붉은 벽돌의 고딕 건축물인 예배당은
사적 제256호로 지정되어 있다.
교회 우측으로 돌면 정동교회 백 주년 기념탑이 보이고 이어서 러시아 대사관과 미국 금융회사인
J.P. 모간, 배재공원을 지나면 붉은 벽돌 건물 앞에 수령 525년의 향나무가 의연하게 서 있는데
이 향나무는 서울시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으며 건물은 1916년 건축된 배재학당의 東館이었다.
배재빌딩을 끼고 우측으로 돌아 서대문 방향으로 진행하면 길 건너에 중앙일보가 보이고
서소문고가도로가 시작되는 지점에 순화빌딩이 있는데 이 부근에 소의문(昭義門. 西小門)이 위치해
있었을 것이나 주위에서 위치표지석을 찾지 못했다.
소의문은 남소문인 광희문과 함께 시신을 문밖으로 내보내던 통로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도로를 건너 중앙일보 뒷길로 남대문을 향하는데 이곳으로 성곽이 이어져 있었던 자리인 듯
숭례성터길이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숭례문(崇禮門. 남대문)이 서 있던 자리에는 불에 탄 숭례문을 복원하는 차단막이 둘러져 있다.
아름답고 늠름한 모습 그대로 어서 우리 곁으로 돌아와 우뚝 서기를 기대한다.
불타기 전 숭례문의 모습.
태조 5년(1396)에 창건되어 세종 30년(1448)에 개축된 국보 숭례문은 도성의 정문 역할을 했는데
풍수설에 의해 관악산의 화기를 누른다는 뜻으로 가로로 쓰여진 다른 성문들의 현판과 달리
세로로 쓰여져 있으며 양녕대군이 썼다고 알려져 있으나 異說이 분분하다.
`예를 숭상한다'는 뜻을 가진 숭례문은 국보 제1호로 지정되어 있으나 아쉽게도 방화로 인하여
2008년 2월 10일 거의 소실되어 지금 복원 중에 있는데 `崇禮門'의 현판은 불이 옮겨 붙기전 떼어내
바닥으로 떨어뜨려 일부가 파손되었으나 자체를 복원하는데는 문제가 없다니 그나마 다행이다.
도로를 건너 숭례문을 좌측으로 끼고 남산을 향해 진행한다.
남산타워와 어린이회관으로 쓰였던 건물이 보인다.
퇴계로에서 서울역으로 이어지는 도로.
고가도로 위로 서울驛舍가 향수를 불러 일으킨다.
우측으로 성곽이 다시 이어진다.
아이들 어렸을 때 손잡고 와 본 이후 참으로 오랫만에 올라와 보는 남산이다.
김유신 장군, 김구 선생, 이시영 선생 동상을 지나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 이른다.
기념관 주위에는 안 의사의 어록들이 돌에 조각되어 서 있다.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 `이익을 보면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함을 보거든
목숨을 바쳐라' 義士다운 말씀이다.
벚꽃위로 보는 남산 타워.
성곽을 따라 계단을 오른다.
성곽은 남산 정상으로 이어져 있다.
성곽돌기를 시작한 동대문 방향에서 왼쪽으로 흐르는 능선에 뾰족하게 북악산이 보이고 그 뒤로는
삼각산 능선이 형제봉, 보현봉을 지나 향로봉 방향으로 병풍처럼 둘러져 있다.
왼쪽으로 눈을 돌리면 북악산에서 인왕산으로 능선이 이어지고 오늘은 밟지 않았지만 무악재를
건너 안산까지 조망되고 있다.
남산(262m) 정상에 도착한다(16:17).
南山은 동쪽의 낙산, 서쪽의 인왕산, 북쪽의 북악산과 함께 서울의 중앙부를 둘러싸고 있으며
옛날에는 목멱산(木覓山), 인경산(引慶山) 등으로 불리웠다.
남산 봉수대지를 본다.
南山烽燧臺址는 남산제모습찾기운동의 일환으로 김정호가 만든 청구도(靑丘圖) 등 관련자료를
검토하여 1993년 5개소 중 1개소를 현위치에 복원했는데 전국의 봉수가 최종적으로 집결되던
중앙봉수대로 서울시 기념물 제14호로 지정되어 있다.
남산 팔각정.
여기에는 왜 그 흔한 현판 하나 달려있지 않은 것일까?
남산의 명물로 우뚝 솟아 있는 남산 타워.
1969년 착공하여 1975년 완공된 높이 236.7m, 해발 479.7m의 전파 송출용 탑으로 서울 전역이
막힘없이 조망되어 관광객들에게 남산의 명소가 되었고 2000년 뉴스 전문 방송국 YTN이
인수한 이후 N서울타워라고 부르고 있다고 한다.
남산 정상에는 2등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다.
삼각점은 전국에 약 2.5Km~ 5Km 간격으로 대부분 산 정상이나 주요 분기봉에 설치되어 있는데
11~19번 까지 1등 삼각점 189개, 21~29번 까지 2등 삼각점 1,102개, 301~ 399번 까지 3등 삼각점이
3,045개, 401~499번 까지 4등 삼각점 11,753개가 전국에 분포되어 있다.
꽃길 옆에 가려져 있는 성곽을 보며 남산을 내려선다.
도로로 인해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지는 성곽.
남산순환도로를 따라 내려오며 옛 타워호텔을 우측으로 본다.
옛날의 명성을 되찾기 위해 리모델링을 하고 있었다.
국립극장 앞으로 내려섰다(16:59).
장춘단공원을 보며 신라호텔 방향으로 진행하여 우리는 자유쎈터에서 장충체육관 뒷쪽으로
이어지는 성곽을 보지 못하고 지나쳐 삼성르노 장충지점으로 길을 건너 성곽을 바라 볼
수 밖에 없었다.
장충체육관은 60~70년 대 서울운동장과 함께 한국 스포츠의 산실이었다.
장충체육관 맞은편에서 바라 본 성곽.
다음기회에 다시 찾아야 할 숙제의 구간이다.
천주교 신당동 성당을 지나고 이정표를 따라 광희문 방향으로 진행한다.
보수된 성곽과 이어진 광희문이 보인다(17:33).
우리는 성곽 안쪽의 주택길로 들어서서 광희문으로 접근했다.
광희문은 四小門 중 하나인 南小門으로 서소문과 함께 시신을 성밖으로 내보내던 시구문(屍軀門)
또는 수구문(水口門)이라고 하였다.
한양공고 앞으로 길을 건너 옛 동대문 운동장 뒷길로 진행하여 공사현장에 들어가 얼마 있으면
철거돼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을 운동장을 물끄러미 바라 보았다.
복원된 청계천은 석양에 빛나고 있었다(17:55).
흥인문으로 진행하는 청계천 도로위에 있는 오간수문터 표지석.
조선 초기 도성을 쌓을 때 청계천의 물줄기가 도성 밖으로 흐르도록 3개의 수문을 만들었다가
나중에 5개로 늘렸는데 흥인문과 광희문을 잇던 성곽 아래에 설치되어 있었다.
아홉 시간 半만에 다시 만나는 보물 제1호인 흥인문.
역광으로 선명하게 사진을 남길 수 없어 유감이었다.
아침에 성곽돌기를 시작할 때의 방향을 바라보니 성곽이 시작되고 있었다.
서울성곽은 태조 5년(1396) 처음 성을 쌓을 때 부터 전체 59,500자(약 18.2Km)를 약 600자(약 180m)
단위로 나누어 총 97구간으로 구획하고 千字文 순으로 구간을 표시하여 북악산 정상에서 천지현황
(天地玄黃)의 天자에서 시작한 구획표시는 낙산, 남산, 인왕산을 거쳐 조민벌죄(弔民伐罪)의
弔자에서 끝나며 사대문과 그 사이에 사소문을 설치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후 외부의 침입에 대비하고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거나
도적을 막기 위해 평지는 土城으로, 산지는 石城으로 쌓기 시작해 세종 때 석성으로 완성하였으며
그 후 몇 차례의 보수공사가 있었으나,
일제 침략이 시작되면서 도시계획의 명분아래 허물어지기 시작하였고 해방과 전쟁의 혼란기에
더욱 심하게 파괴된 것을 1975년 부터 종합적인 서울성곽 복원사업을 시작하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하여 옛 모습으로 복원하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성곽일주 지도.
우리는 동대문 부터 화살표 반대방향으로 성곽을 따라 돌았다.
서울 성곽 옛지도.
탐방일자: 2009. 4. 7. 화요일.
탐방경로: 흥인지문(동대문)~ 낙산공원~ 대학로~ 혜화문(동소문)~ 와룡공원~말바위쉼터~
숙정문(북대문)~ 백악산(북악산)~ 창의문(북소문)~ 인왕산~ 강북삼성병원
(돈의문=서대문,멸실)~ 정동극장~ 순화빌딩 앞(소의문=서소문, 멸실)~ 중앙일보~ 숭례문
(남대문, 멸실, 복원 중)~ 목멱산(남산)~ 국립극장~ 장충체육관~ 광희문(남소문)~ 흥인지문
탐방날씨: 맑고 무더움. 깨스로 조망 별로좋지 않음.
*상기 탐방문은 성곽따라 돌기를 하면서 설치되어 있는 안내판의 내용을 발췌하거나 인터넷을
검색하여 참고한 내용들이 있는 바 오류나 잘못 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음을 양지바라며
그러한 내용을 발견하시면 댓글을 남기시거나 지적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국내 산행및 여행 > 산따라 물따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유자적 부용산 즈려밟기 (0) | 2009.06.14 |
---|---|
금학산과 고대산 연계산행기 (0) | 2009.05.19 |
화대 종주 산행기(3) (0) | 2009.04.10 |
화대종주 산행기(2) (0) | 2009.04.08 |
화대종주 산행기(1) (0) | 2009.03.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