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무 속에서 본 황산(2)
어제 7~8시간을 걸어다닌 우리는 평소에 산행을 해왔던 사람들은 별 무리가 아니겠으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오늘 상당히 힘들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아내도 평소 무릎관절이 좋지 못하여 상당히 우려를 하였는데 어젯저녁에 숙소에서 거금 20
달러에 팁까지 얹어 지불하고 받은 발 맛사지 덕분인지 예상보다는 통증이 덜 한 눈치다.
오늘 새벽에 비가 내리지 않으면 청량대에 올라가 일출을 감상하도록 계획되어 있었으나
4시 반경 후두둑 거리는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어보니 비가 거세게 내리고 있다.
어제 운무속을 헤매느라 황산을 전체적으로 조망하지 못하여 아쉬운데 황산의 오절(五絶) 즉,
기송(奇松), 괴석(怪石), 운해(雲海), 온천(溫泉), 동설(冬雪)과 함께 황산절경의 백미라는
청량대 일출도 물건너 갔으니 정말 날씨가 원망스러울 뿐이다.
오늘은 오전에 몽필생화, 흑호송을 거쳐 시신봉을 돌아 백아령까지 내려와서 운곡케이블카를
이용해 황산을 내려 갈 팀과 도보로 하산 할 팀으로 구분하여 황산 트레킹을 마친다는
가이드의 설명이다.
아침식사를 하기 직전까지 제법 굵은 빗줄기가 그치지 않아 청량대 일출은 고사하고 제대로
오늘 일정을 소화 할 수 있을까 걱정을 하였으나 다행히 채비를 차리고 나서니 비가
잦아들어 한시름 덜었다는 일행들의 표정이다.
우의를 뒤집어 쓰고 제일 먼저 들른 곳이 숙소 바로 옆에 있는 몽필생화이다.
몽필생화(夢筆生花)는 필가봉과 근접하여 마주보고 있는데 뾰족하게 솟은 石峰에 한 그루의
古松이 자리잡고 있는 峰으로, 詩仙 李白이 어리던 어느날 잠을 자다 `평소에 사용하던
붓머리에서 꽃이 만발한 꿈' 꾸었다는 일화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뾰족한 붓대 모양의 끝에서 자라던 소나무는 안타깝게 1970년 대에 枯死하여 지금은
모조품을 만들어 세워 놓았다고 하는데,
`無石不松 無松不奇(무석불송 무송불기)'라는 말이 있듯이 황산절경의 奇巖과 소나무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잘 표현하고 있는 말일 것이다.
몽필생화 맞은 편에는 붓을 걸어 놓은 것 같다는 필가봉(筆架峰)이 서 있는데 다섯 자루의 붓을
거꾸로 세워 놓은 듯 하다는데 보는 이들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나 그 절경에는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흑호송(黑虎松)을 본다.
어느날 스님이 이 소나무 밑에서 꿈을 꾸는데 `호랑이 한마리가 이곳에서 자다가 사라졌다'는
일화가 전해 진다고 하는데 거무틱틱한 표피가 흑호를 연상 시킨다.
연리송(連理松)이라 명명된 소나무 앞에 선다.
한 뿌리에서 두 줄기로 갈라져 자라고 있다고 하여 일명 夫婦松이라고도 하는데 높이 16.5m,
둘레 2.2m로 부부가 손잡고 한 바퀴 돌게되면 금슬이 좋아진다고 한다.
용족송(龍足松) 앞을 지난다.
나무 뿌리가 용의 발가락을 닮았다 하여 용족송이라는데 고개가 갸우뚱해 진다.
아무튼 안내판에는 용족송의 설명과 함께 높이 12.8m, 둘레 1.6m라고 표기하고 있다.
용족송 옆의 또 다른 소나무에는 다른 樹種의 나무가 붙어 자라고 있다.
가이드는 이 소나무가 바람을 피워 다른 자식을 보았다고 `바람송'이라고 말한다.
탐해송(探海松)이 손을 뻗어 우리를 부른다.
앞으로 뻗어나온 가지가 흩어지는 운무사이로 목을 쭉 빼고 바다를 그리워하여 찾고(探)있는 것
같다는 이 소나무는 시신봉(始信峰)의 기암에 오 백년을 넘게 비스듬히 서 있다고 한다.
희미하게 모습을 보이는 시신봉(始信峰).
황산이 오악(五嶽)- 東嶽의 태산(泰山), 西嶽인 화산(華山), 南嶽인 형산(衡山), 北嶽의 항산(恒山),
中嶽인 숭산(嵩山)-을 능가한다는 말을 이 봉우리에 이르러서 드디어 믿기 시작한다고 한다.
`五岳歸來不看山(오악귀래불간산) 오악을 보고 온 사람은 다른 산을 보지 않고,
黃山歸來不看五(황산귀래불간오) 황산을 본 사람은 오악을 찾지 않는다'는 말이 황산 절경의
빼어남을 말해주고 있다.
수금송(竪琴松)을 찾아간다.
와운봉(臥雲峰) 북쪽 언덕에 있는데 생긴 모양이 중국식 수금(하프)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나무 높이 7.5m, 둘레 1.7m, 가지의 폭 11.7*11.5m라고 안내되어 있다.
이제 백아령으로 내려서 케이블카를 이용할 사람과 도보로 하산할 사람을 분류하는데 두 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걸어서 내려가기를 원한다.
머리위의 케이블카를 따라 내려서는 오른쪽 봉우리들이 운무속에서 신비로운 모습을 간간히
드러내 우리의 수고에 답례를 보낸다.
백아령에서 운곡사의 중간쯤에 위치한 입승정(入勝亭)에 이른다.
계단길을 내려서며 지친 두 다리를 휴식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일년 중 이백 일 이상 비가 오거나 흐려 운무가 황산을 뒤덮고 있어서 雲山이라 불리웠던 이곳은,
구름은 늘 바다를 이루고 사람들은 산에서 바다를 보았기 때문에 황산구역은 구름이 동서남북
골짜기를 타고 갈라지는 모양을 본따서 다섯 개의 구름바다(北海, 東海, 西海, 前海, 天海)로
구분하고 있다.
실제 이곳은 2억 년 전까지 바다였고 그 후 오랜 세월동안 침식과 풍화작용을 거쳐 기암괴석의 산을
이루게 됐다고 하는데 예로부터 수많은 시인과 화가들이 황산의 아름다움을 예술작품으로
표현하고자 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붓을 던지고 말았다고 한다.
오전이라 그런지 정말 많은 짐꾼들이 돌계단을 힘겹게 오르고 있었는데 호텔에서 소비되는
食材料는 물론, 공사를 위한 건설자재와 그 도구까지 짐의 내용물도 참 다양하다.
`케이블카를 이용하면 될 것를 왜 저리 고생시키느냐'는 누군가의 말에 `그들이 먹고 살 일거리
창출이 더 시급하지 않겠냐'는 대답이 일리있게 들린다.
운곡(雲谷)케이블카 매표소를 내려선다.
버스로 황산입구에 있는 식당으로 이동한다.
경상도에서 왔다는 중년의 남자가 주인인 이 집은 `서울집'이라는 간판을 달았는데 한국 관광객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다.
황산시내로 버스는 달린다.
황산은 1987년 휘주(徽州)라는 지명을 개명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는데 이곳은 마두(馬頭)문화가
형성되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이곳 사람들은 옛날(明, 靑)때 부터 12~14세의 어린나이에 早婚 하는 풍습이 있었고 결혼 후 남자들은
外地로 나가 출세하여 말을 타고 錦衣還鄕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으며 여자들은 시어미와 함께 집을
지키며 남편의 歸還을 학수고대하였다 한다.
자연 여자들만 사는 이 고장 사람들은 도적들의 피해를 최소화 하기 위해 집을 붙여 지었으며, 강도로
부터 젊은 처자들을 보호할 목적으로 2층의 집을 짓고 창문도 내지 않은 상태로 1층에는 시어머니가
거주하고 2층에는 젊은 며느리를 거주시켰다고 한다.
화재 발생시에 그 번짐을 막기위해 집집마다 지붕보다 담을 높게 쌓아올렸는데 이 모양이 마치 말의
머리 같다 하여 `馬頭建築'이라는 건축양식을 만들어 냈다고 한다.
이곳 사람들의 학문을 숭상하고 배움을 중시하는 정신이 건축물에도 잘 나타나 `지붕의 검은 기와는
먹을 상징하며 흰 벽은 종이에 비유된다'는 가이드의 설명이다.
이 지방은 비교적 따뜻한 날씨여서 난방시설을 하지않는 대신 잠깐 오는 겨울을 대비해 햇빛이
잘 흡수되는 검은 기와를 사용했다는 설명을 덧붙인다.
이곳 사람들은 돼지를 잡아 오래 보관하는 방편으로 소금물에 일주일 정도를 절여 벽에 걸어 두는데
그 냄새가 코를 들지 못 할 정도로 고약하지만 이 돼지고기 요리는 아주 막역한 관계의 사람에게만
대접한다고 하며 오래되어 까맣고 단단 할 수록 가치가 있고 벽에 걸려진 숫자에 따라 그 가정의
빈부 정도를 나타낸다고 한다.
(황산시내로 들어오면서 길가에서 본 전통적인 마두건축양식의 촌락)
이 지방은 유채를 많이 재배하여 중국인들의 음식문화에서 꼭 필요한 식용유를 생산하고 있는데
우리나라 제주도의 유채꽃밭은 이지방 유채꽃밭 규모에 비하면 鳥足之血이다.
황산시내로 돌아오는 길에 버스를 세우고 일행들과 기념촬영을 하며 유채꽃의 향기에 흠뻑 취해
보는데 유채꽃 향기가 이렇게 좋은 줄 여기서 알게 되었다.
첫 밤을 묵었던 황산호텔에서 짐을 찾아 황산시내를 가로지르는 신한강을 건너 명청노가(明靑老街)를
관광하기 위해 이동하는데 한국 관광객이 자주 찾는 점포 앞에서 우리를 상대로 물건을 팔기 위한
상인들의 노력이 대단하고, 이제 중국이 共産主義 사회라고 할 만한 징후들을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명청 옛거리는 그 당시의 옛날 건물들도 있었으나 관광객들을 위해 재단장한 모습이다.
여기에서도 마두건축 양식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서예재료를 파는 상점에 관심이 있었는데 중국의 어디를 가나 그렇듯이 조그만 가게의
간판들도 예술적인 것들이 너무도 많아 중국 문화의 전통과 우수성을 느끼기에 충분했으며 일면
부러운 생각도 들었다.
약간의 서예도구(먹과 인주)를 샀는데 중국에서도 우리나라 처럼 흥정이 필요함을 체험하였다.
중국에서 마지막 밤을 보낼 항주로 이동하는 항휘고속도로 양편으로 펼쳐지는 광경은 황산으로
이동할 때 암흑속에서 본 풍경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길가에서 산위까지 끝없이 이어지는 노란 유채꽃의 아름다움은 그림의 연속이었고,
용정차(龍井茶)의 명성을 겉으로나마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전원주택(?)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집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어 여기가 결코 국민소득 몇 천불의
공산국가가 아님을 실감한다.
西湖로 가는 표지판을 보며 항주까지 왔다가 `중국에서 가장 아름답고 유명하다'는 서호를 보지
못하고 지나치는 마음이 너무 아쉽기만 하다.
지나는 곳곳마다 중국은 비상하기 위하여 꿈틀대고 있었다.
특히나 2008년 북경 올림픽을 기회로 세계최강의 국가로 발돋움 하려는 노력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보았다.
항주소산빈관(杭州蕭山賓館)에 투숙하여 마지막 밤을 보냈는데 이곳에도 한국 관광객이 북적이는
것을 보며 우리의 위상도 많이 높아져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튿날 공항으로 이동하는 차안에서 보는 항주의 소산거리는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는 계획된
도시로 무한한 발전 가능성을 짐작하기에 충분했다.
항주소산 국제공항을 이륙하는 비행기 안에서도 커다한 웅비의 날개짓을 하는 중국이 머리를
계속 스쳐가고 있었다.
3월 22일 부터 3박 4일 간 `登頂黃山(등정황산) 天下無山(천하무산)'이라는 황산을 트레킹하며 만난
운무는 `어찌 황산을 한 번 방문으로 끝내려 하느냐'고 반문하며 나에게 다시 찾을 것을 주문하고
있었다.
황산은 중국 남부 안후이성(安徽省)의 남쪽 동경 117~118도, 북위 29~30도에 위치하며 중국
10대 명승지중 하나이고, 1990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및 자연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2004년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중국은 960만 키로 제곱미터의 넓은 국토를 가지고 있어 남북한의 약 43배에 달하며, 2000년 현재
12억 9500만명의 인구로 세계인구의 약 1/5을 차지하고 있다.
漢族 94%와 55 개의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세계에서 4번째로 긴 강인 양자강(長江.
5800Km)이 흐르고 있고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인 황하(黃河)가 있다.
*본 황산 방문기는 현지 가이드의 설명, 현지 안내판에 서술되어 있는 내용, 先登者들의 방문기를
참고하여 기술하였으며, 사실과 다르거나 잘못 표기된 내용이 있을 수 있음을 참고하시기 바라고
그 내용을 알려주시면 정정하겠으니 양해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