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령산의 암봉을 넘어 제3관문에 서다
올 해 3월에 백두대간을 시작했으니 반년이 지났다.
격주로 산행이 계획되어 있으니 2년이란 시간이 소요될텐데 약 4분지 1을
끝낸 셈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한 백두대간인데 지금껏 무사하게
산행을 할 수 있도록 여러가지로 도움을 준 지우(知友)들과 대간을 이해하며
옆에서 지켜봐 준 아내에게 감사한다.
그동안 내 사정으로 대간산행을 참가하지 못한 것은 전번 백화산 산행시 선산의
벌초관계로 인해 불참하였고 폭우로 입산이 금지되는 바람에 청화산 조항산 구간이
산행취소 되었다.
이번 주말에는 한 달만에 대간길을 나서게 되니 마음은 마치 처녀를 기다리는
총각의 심정같이 일각여삼추(一刻如三秋)다.
오늘(9/30)은 이화령~조령샘~조령산~신선암봉~치마바위봉~조령3관문으로
내려서 조령산 휴양림을 지나 이화여대 수련원까지 산행이 계획되어 있다.
영남의 관문 이화령이라는 표지석이 우리를 반겨 맞는다.
10시가 채 되지 않아 도착한 우리는 늘 그렇듯이 숨돌릴 여유도 없이 행군을 시작한다.
등산로 양편으로는 나무잎들이 목말라 피곤에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빼꼼히 내비치는 가을하늘은 맑다.
꽃도 예쁘다.
초입부터 오르막길은 계속된다.
40여 분을 올라 조령샘에 닿는다.
해발 870m에 위치한 조령샘은 년중 물길이 끊기지 않는다고 한다.
여기에도 꽃은 또 피어 있다.
조령산을 오르는 길.
조령산이 가까워옴을 알린다.
조령산 정상에 올라서니 한켠에 유명을 달리한 산악인의 추모팻말이 서 있다.
주흘산(主屹山 1106m)이 멀리 보인다.
산행을 시작한지 한 시간만에 조령산(鳥嶺山 1025m) 정상에 섰다.
암봉이 능선을 이루며 끝없이 펼쳐진다.
멀리 월악산도 보인다.
주흘산 마루금이 아름답다.
신선암봉길 저쪽으로 매패봉(910m)과 신선봉(967m)이 보인다.
조령3관문은 3시간 여 거리에 있음을 알린다.
조령3관문을 향해 내려선다.
밧줄이 계속 매여져 있어 잡기만 하면 안전하다.
해발 900m를 넘나드는 이곳에는 단풍이 곱다.
계속되는 암릉이 장관이다.
주흘산이 더욱 선명하다.
암봉길 우측으로 마패봉과 신선봉이 이어지고
그 사이로 월악산으로 흐르는 능선이 보인다.
밧줄타고 오르내림은 반복된다.
신선암봉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안내한다.
지나온 암봉을 뒤 돌아 보면 보드라운 능선길이다.
그러나 전면으로는 눈을 이리저리 돌려보아도 암봉의 이어짐은 계속된다.
산자락에 겹겹이 둘러쌓인 농촌의 가을풍경이 풍요롭게 다가온다.
암릉길에도 야생화는 피고 있다.
거대한 바위의 이끼(?)도 단풍색이 되어가고 있고 너머에는 주흘산이 있다.
신선암봉에 도착한다.
전망이 최고다.
배낭을 내리고 등산화 끈도 풀렀다.
간식으로 원기를 보충한다.
간식을 하면서도 몇 컷 누른다.
매패봉이 가까워 졌다.
우리가 가야할 능선길이다.
산등성이의 단풍이 아래로 흘러 내린다.
산죽길도 지난다.
꽃이 있는 곳에 벌과 나비가 찾는다.
동양화가 아름답다.
석부작 분재도 좋다.
바쁜 바람은 이곳을 지난다.
월악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줌을 당겨 본다.
주흘산 능선이 멋지다.
깃대봉으로 오르는 갈림길 도착.
깃대봉 뒤로 신선봉이 살짝 고개를 내민다.
깃대봉에서 뒤 돌아 본 능선이 그림이다.
깃대봉을 내려와 3관문으로 내려서며 보는 축성의 흔적(痕跡).
제3관문에 다 내려서서 만나는 조령약수.
조선숙종 34년(1708년) 조령성 구축시 새재정상(鳥嶺 650m)에서 발견된 약수로
이 물을 즐겨 마시면 장수한다하여 백수령천(百壽靈泉)이라고 한다.
측면에서 본 조령3관문 전경.
3관문 주위에는 김종직(1431~1492)이 새재를 넘으며 읊었다는 과조령(過鳥嶺)이라는
제목의 시비가 있다.
새재를 지나는 길에
나라님 부름 받아 새재를 넘자니
봉우리 꼭대기에 겨울 빛이 차갑구나.
벼슬길로 돌아가는 부끄러운 이 마음
개울 바닥 뒹구는 마른 잎 같아라.
대궐 안에 아부꾼들 멀어지면
조정엔 오가는 말 화락하리라.
근심과 걱정으로 십 년을 보냈건만
날뛰는 금수무리 잡아내지 못하였네.
전면의 현판에는 영남제3관(嶺南第三關)이라고 표기되어 있고,
후면에는 조령관(鳥嶺關)이라고 쓰여져 있다.
문경관문(聞慶關門)은 고려 태조가 경주를 순행차 고사갈이성(高思葛伊城)을 지날 때
성주(城主) 흥달(興達)이 세 아들을 차례로 보내어 귀순하였다는 전설이 서려 있다.
이곳은 영남에서 서울로 통하는 관문이며 군사적 요새지(要塞地)이다.
삼국시대에는 여기보다 동쪽에 위치한 계립령이 중요한 곳이었으나 고려초부터 이곳
초참(草站)을 새재 혹은 조령이라 이름하고 중요한 교통로로 이용하였다 한다.
임진왜란 때에는 이곳을 버리고 충주로 후퇴하였는데 그후 충주에서 일어난 의병장
신충원(辛忠元)이 오늘날의 제2관문에 성을 쌓고 교통을 차단하며 적을 기습했다.
이곳의 군사적 중요성이 재확인 되자 군사시설을 서둘러 숙종 34년(1708년)에
이르러서야 3중의 관문을 완성 하였다.
문경에서 충주로 통하는 제1관문을 주흘관(主屹關), 제2관문을 조동문(鳥東門) 또는
조곡관(鳥谷關), 제3관문을 조령관(鳥嶺關)이라고 이름한다.
영남의 선비들이 청운의 뜻을 품고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갔는데 남쪽의 추풍령(秋風嶺),
북쪽의 죽령(竹嶺), 가운데로 이곳 새재(鳥嶺)가 있으나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고 죽령을 넘으면 미끄러진다 하여 과객들은 이곳을 넘었다고 한다.
조령산 자연휴양림으로 내려서는 길은 잘 정비되어 있다.
휴양림을 지나 마을로 내려서는 길은 가을의 향취가 가득하다.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 고사리마을 입구에 서 있는 소나무.
수령 약 350년, 높이 12미터, 밑 둘레 3.3미터 (괴산군 보호수 제24호)